글쓰기 프로그램을 처음 진행했을 때의 일이다. ‘나의 첫 기억’을 주제로 글을 쓰는 시간이었다. 한 줄 일기도 괜찮으니 글을 쓰고 그림으로 보충 설명을 하고 한 명씩 발표하면 끝이 나는, 아주 쉽고 가벼운 시간이었다. 그날은 열다섯 명 정도가 나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프로그램은 이렇게 시작했다. 한 명씩 이름을 부르며 출석 체크를 하고, 오늘의 기분이 어떤지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식으로. 그러면 사람들은 기계처럼 대답한다. 좋아요, 네, 날씨가 좋네요. 선생님, 건강하시죠. 이런 안부를 주고받다 조용해지면 본격적인 활동으로 들어간다.
<글쓰기 치료>라는 이름과 걸맞게 첫 회기부터 글을 쓰는 시간을 준비했다. 처음이니까 쉽게, 각자의 현재 고민을 쓰는 거다. 에이포 용지를 한 장씩 나누자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인상을 팍 쓰고 자기 마음에 머무르고 있는 생각들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잘 쓰다 말고 지우는 사람도, 막힘 없이 쓰기만 하는 사람도, 옆 사람이 무얼 쓰는지 보기만 하는 사람도,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 나의 역할은 흘러가는 대로 그냥 두는 것이었다. 이십 분 정도 글을 쓰고 우리는 각자 어떤 고민을 종이에 담았는지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발표는 이렇게 시작이 되었다.
“저의 고민은 살이 찐 거예요. 1년 만에 10㎏이나 쪘거든요.” 그리고 다음 사람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저의 고민은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나는 거예요. 아무 이유도 없이 눈물이 줄줄 나서 힘들어 죽겠어요. 특히 잠들기 전이나 밥을 먹기 전에 눈물이 줄줄 나와요.”
“저는 고민이 없어요. 남자친구랑 말이 잘 통하거든요. 하나님과 가까이 계시는 예수님. 이건 비밀인데, 제 남자친구는 예수님이에요. 비밀 지켜주세요!”
“제 고민은 환청이에요. 가끔 비누를 씹어 먹으라는 소리가 들려서 진짜로 비누를 이빨로 깍 깨문 적이 있어요. 보호사님이 말려 삼키지는 않은 게 다행이죠. 밥을 먹을 때는 나물만 먹어라, 밥은 다 갖다 버려라. 이 쓰레기 같은 놈. 이런 소리가 들려요. 이 소리를 완전히 없애고 싶어요.”
“저의 고민은 친구가 없다는 거예요. 장난을 주고받을 친구도, 바닷가에 같이 갈 사람도 없어요. 좀 외로운 감정이 느껴져서, 그런 제 모습을 그려봤어요.”
“저의 고민은 이 병원이 갑자기 불에 타 없어질까 봐 불안한 거예요. 원장 선생님이 갑자기 죽으면 저는 어떡하죠? 제 약은 누가 타주죠? 아무래도 대비를 해야할 것 같아요.”
내가 예상한 고민은 취업이 잘되지 않는다는 것과 저축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것, 누군가와 싸웠기 때문에 화해하고 싶다는 것, 잠들기 어렵다는 것. 그 정도 무게였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무겁고 기이하다는 생각에 금세 민망해졌고, 그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나는 황급히 다음 차례로 순서를 넘기고 있었다.
잘 들었습니다. 네네, 모두 박수 쳐 주세요. 네. 좋아요.
그런가 하면 자기 차례가 되자 손사래를 치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비록 자기가 쓴 고민을 낭독하지는 않았지만, 프로그램이 끝나고 난 후에 자기가 쓴 글을 무심하게 내게 건네고 떠났다. 그리고 그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져 있었다. “선생님, 저 뒷담화하는 거 다 알아요. 왜 저를 왕따 시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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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형태가 다양하듯 상처에도 다양한 형태가 있다. 어떤 상처는 엉엉 울고 나면 소화가 되는가 하면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도 있다. 상처의 공통점은 받는 이의 입장에서 폭력적이라는 것에 있으나, 모든 폭력과 억압이 무조건 상처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받는 이의 입장에서 그 폭력을 ‘끊어낼 수 있느냐’와 ‘그렇지 않으냐’로 나뉠 뿐이다. 오래 가는, 그리고 강력한 상처의 특징은 노력으로 그 관계를 끊어낼 수 없는 권력 구조에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아이를 정서적으로 조종하고 신체적으로 폭행하는 양육자, 양육자의 애인이 가하는 성적·신체적·정서적 학대, 집단으로 한 사람의 영혼을 파괴하는 학교폭력, 그것에 도움을 주지 못할망정 2차 가해를 하는 선생님, 종교집단 내 권력자의 회유 또는 협박, 남편의 협박과 강요, 나이 또는 권력의 차이로 생기는 힘의 불균형.
그리고 그 고리를 끊을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약자에게 무력감을 학습하게 한다. 혹자는 학습된 무기력으로 인한 우울을 마음의 감기라고 하지만 실은 뇌가 고장 난 것에 더 가깝다. 아무튼, 사랑의 형태가 다양하듯 상처의 형태 또한 다양하다. 상처는 위에서 언급한 연유를 가지고 다음 세 가지 유형으로 발현된다.
첫 번째는 ‘관계 사고’이다. 누군가가 나를 해칠 것 같다거나 무리 지어진 사람들이 나를 욕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물이나 사람이 나와 분명한 관계가 있을 것 같다는 감각과 믿음이 생긴다.
두 번째는 ‘지각의 변화’이다. 철학, 미신, 종교, 예술, 교육 등의 분야를 탐독하는 것이다. 원래 그러한 관심이 없었으나 갑자기 관심이 생길 때를 말하며 단순한 궁금증을 넘어 꽂히는 것에 가깝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의 어깨를 토닥인 것에서 ‘신이 왔다 갔음’을 느꼈다거나, 그것을 몇 번이고 씻어내겠다는 강박이 생긴 것을 의미한다.
세 번째는 ‘감정의 변화’이다. 갑자기 우울해졌거나 쉽게 짜증이 나는 경우를 말한다. 우울이 심해지면 ‘검은 그림자’ ‘괴물’ ‘동물’ 등과 같은 무언가로 보이기도 한다. 또는, 환청이 들리기도 한다. 그래서 우울이 심각해졌을 때 그 감정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 또, 그 감정이 적절한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 살펴봐야 한다. 감정이 부적절할 때는 다음과 같다. 장례식에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거나, 누군가와 함께 행복했던 순간을 이야기하는데 눈물이 터져 나온다거나 하는 식이다. 감정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 그 감정이 적절한지 살펴봐야 한다.
내가 진행한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 유형을 모두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털어놓은 고민이 비현실적이기는 하지만, 무게가 너무나 무겁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 고민이 견고한 믿음으로 굳어진 까닭은 명확했다. 가정폭력, 성폭력, 학교폭력, 직장 내 괴롭힘, 불법 촬영, 아내폭력 등과 같은 각종 폭력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 폭력은 때로 말 뿐이기도, 때로 행동과 함께 나타나기도 했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받는 이의 입장에서 스스로 그 억압을 끊어낼 힘이 없었다는 것에 있었다. 주체성이 없는 관계에서 만들어진 무력감이 증상으로 발현하기까지는 시간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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