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요리하는 방법>
하나. 주변 사람들에게서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요?
질문한다.
둘. 듣고 싶다고 한 그 말에 감정을 담아 해준다.
그때 그 기억 따뜻했지, 그건 약간 상했어, 양념장도 만들래
요리조리
요리조리
사람들의 더러운 말 흐르는 물에 30초 씻어
도마 위에 올려주세요
이 말에는 벌레가 잘 붙어 있어 꼼꼼히 씻어야 해요
뿌리는 자르고 돌돌 말아 푹, 푹 썰어주세요
사람들의 건조한 말 6분간 삶아주세요
눌어붙지 않게 소금을 툭 툭 뿌려주세요
불을 끄고 체에 거른 다음 찬물로 헹굴게요
촉촉해진 말을 그릇에 옮기고
깨끗해진 말을 그 위에 올리세요
사람들의 느끼한 말
한 큰술 둘러 향긋하게 만들면 완성
맛있게 드세요
정말 맛있어요
저도 좋아하는 맛이에요
저도 한 번 해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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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자기소개 간단히 해주실 수 있을까요?
은: 안녕하세요. 저는 대학에서 간호학과를 전공했고 지금은 보건교사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은입니다. 저도 정신건강 교육 콘텐츠 쪽으로 관심이 있어요. 저는 2년 전에 병원에서 중증도 우울 에피소드 진단을 받았는데요. 그때부터 우울과 불안이 더 심해졌어요. 그리고 한 1년 반 정도 약물치료를 받았습니다.
진단을 받기 전에는 아빠가 돌아가시고, 가정폭력이 있었어요. 그러고 나서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제 삶이 정상적이지 않았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공부를 열심히 하던 중에 학업 스트레스가 겹쳤고요. 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우울, 불안이 많이 올라왔었어요.
대학생 때 자취를 하다가 졸업 후에 본가로 돌아오면서 괜찮아지기는 했거든요. 그런데 대학 동기들이 옆에 있다가 혼자서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게 우울해서 가끔 증상이 올라올 때도 있어요. ‘내가 잘 하고 있나?’ 불안하기도 하고요.
휘: 그러셨군요. 증상을 전반적으로 훑어주셨는데 그중에서 제일 어려웠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은: 자해, 자살 충동 때문에 가장 힘들었어요. 커터칼을 쓰기도 했고요. 정말 힘들 때는 간호학과 옥상에 올라간 적도 있어요. 제가 대학생 때 공모전 활동을 열심히 했어요. 그래서 친구들이 제가 힘든 걸 보고 “네가 그럴 줄은 몰랐다.”라고 말하더라고요. 겉으로는 밝아 보이지만, 내면은 그렇지 않으니까 힘들었죠.
휘: 진짜 죽음을 생각하고 거기에 좀 가까워져야겠다고 액션을 취할 때는 뭐랄까, 조용히 처리할 수도 있잖아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은 님은 도움을 구하셨는지 궁금해요.
은: 저는 사람들한테 많이 도와달라고 했어요. 같은 학번 동기들, 후배, 선배한테 말해서 조언을 구했거든요. 그 사람들이 교수님한테 알려서 교수님이 저한테 따로 조언해주시고. 그러면서 버틸 수 있었어요.
휘: 동기가 다른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전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배신감이 안 드셨어요?
은: 엄청 들었어요. 저는 제가 힘든 걸 가족이 몰랐으면 했거든요. 그래서 가족들에게 말을 전할까 봐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그렇게는 하지 않아서 괜찮아졌어요.
휘: 그러면 지금도 가족분들이 은 님의 상황을 모르시나요?
은: 가족들은 제가 병원에 한 번 갔었다는 정도만 알고 1년 반 넘게 약을 먹었다는 건 아무도 몰라요. 옛날에 저희 아빠랑 할머니도 우울증을 경험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가족들한테 힘들다고 하면 “너 정신병자냐.” “네가 그러니까 아빠랑 똑같지.” “네가 뭐가 힘든데?” 이렇게 말해요. 그래서 더는 제 마음을 말하고 싶지 않더라고요.
휘: 누가 그런 말을 한 거예요?
은: 엄마가 제일 심해요.
휘: 그러면 저 같아도 힘들다는 말을 못 할 것 같아요.
은: 네. 그래서 청소년 상담복지센터에서 4~5개월 정도 상담을 받았었어요.
휘: 거기는 미성년자만 이용하는 게 아닌가 봐요.
은: 네. 만 24세까지 상담할 수 있어요. 저는 만 21살, 22살 이때쯤 갔었고요. 원래 정신건강복지센터를 이용하려고 했었는데 센터 측에서 안 된다고 했어요.
휘: 왜요?
은: 그게 주소지 때문이에요. 주민등록상 주소지가 경기도로 되어 있었지만, 실거주지는 제주도였거든요. 경기도 내의 정신건강복지센터만 이용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상담을 받을 때마다 경기도까지 가야 하는 게 번거롭잖아요. 그래서 우리나라 문제가 너무 크지 않나 그때 딱 실감했어요.
결국 밤에는 24시간 상담이 되는 1388(청소년사이버상담센터) 아니면 1577-0199(정신건강상담전화)를 이용했어요. 당시에는 대학에서 대외활동을 준비했었는데요. 교수님들이 “네가 이걸 왜 준비하냐.” “바로 임상을 해라.” 그렇게 말하니까 가스라이팅 당한 것처럼 막 우울하더라고요. 간호 실습을 할 때 압박감도 엄청 심했고요. 그래서 간호학과 옥상에서 뛰어내리려다가 1388에 전화를 했어요. 상담사한테 당장 죽겠다고 하면 부모님께 알릴 것 같아서 “지금 당장 죽을 건 아니고요.”라고 얘기한 기억이 나요.
휘: 거기에서는 뭐라고 반응하셨어요?
은: 그냥 제 이야기를 잘 들어주셨어요. 1577-0199에서는 상담이 끝난 후에도 수시로 연락이 와서 “지금 기분이 어때요?” “오늘은 뭘 하셨어요?” 계속 물어보셨어요. 늦은 밤에도 누군가에게 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았고, 무엇보다 가족한테 알리지 않아서 감사했어요.
사실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1388을 이용했었어요. 그래서 성인이 된 후로도 쉽게 전화할 수 있었어요. 그전에 상담한 경험이 없었다면 조용히 죽었을 것 같아요.
휘: 아, 너무 무서워요. 그렇게 상황이 달라지는 게. 상담 경험은 구체적으로 어떠셨나요?
은: 상담사마다 너무 다른데요. 옛날에 어떤 상담사가 “선생님보다 더 급한 사람이 있으니까 전화 끊을게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어요. 그냥 “네, 네, 네.”만 하다가 “시간 되실 때 저희 센터 한 번 방문하세요.” 이러는 분도 있었고요. “선생님 사시는 곳이 저희 담당이 아니라서 저희가 뭐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요. 죄송해요. 그냥 지금만 이야기 들어드릴게요.” 이렇게 말한 사람도 있었어요.
휘: 그런데도 또다시 상담 기관에 전화할 힘은 어디에서 났나요?
은: 좋은 상담사를 만난 기억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에요.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1388이 막 나왔거든요. 당시에 경찰서에서 ‘고민이 있을 때 1388!’이 적힌 줄자를 나눠 주면서 홍보한 적이 있어요. 그걸 보고 무작정 전화를 걸었죠.
휘: 우와. (웃음) 초등학교 5학년 때는 무슨 고민을 말하셨어요?
은: “친구랑 싸웠는데 어떻게 할까요?” 이렇게 물어봤어요. 그때 상담사분이 “편지를 전해주는 게 어떨까요?”라고 답해주신 게 기억에 남아요.
휘: 너무 귀여워요.
은: 그때부터 고민이 생길 때마다 편하게 전화했어요. 그런데 대학교 상담센터는 못 믿겠더라고요. 거기에서 제 개인 정보를 유출했거든요. 상담지를 원래 상담사 선생님이 가지고 다녀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걸 잊어버리고 상담 내용이 다 보이게 테이블에 내버려 두고 가신 거예요. 그걸 다른 학생들이 알게 됐고, 학교 내에서 소문이 났어요. 그다음부터는 상담을 취소하고 안 갔죠.
평소에는 청소년상담복지센터를 이용했어요. 거기에서는 소외계층 학생에게 무료로 풀 배터리 검사(종합심리검사)*를 해줘요. 그때 당시에 정신적으로 힘들 때라 그런지는 몰라도 아이큐가 너무 낮게 나와서 충격적이었어요.
* 풀 배터리 검사: 개인의 심리적 문제를 평가하기 위해 상담 초기에 사용하는 검사 도구이다. 검사 종류로는 벤더 게슈탈트 검사(BGT), K-WAIS/K-WISC/K-ABC(인지력 및 지능 검사), MMPI-2(성격 및 정신적 병리 임상 검사), 로샤 검사(인격 특성을 평가하는 투사적 검사), HTP(집, 나무, 사람 그림 검사), KFD(동적 가족화 그림 검사), SCT(문장완성검사), TAT(주제통각검사)가 있다. 정신건강의학과나 사설 상담센터 기준, 평균 가격이 30~70만 원 선이다. 국가에서 지원금을 받은 상담센터에서는 인원/증상의 정도 등을 고려하여 무료로 진행하고 있다.
휘: 아이큐가 몇으로 나왔어요?
은: 86이요. 그래서 정신질환이 되게 무섭구나, 느꼈어요. 우울증이 한번 심하게 오니까 기억력이나 집중력이 엄청 떨어지더라고요. 약을 먹어도 똑같았어요. 오히려 약을 먹으면 더 몽롱해졌죠. 종일 자고 싶고 원래 먹던 것도 안 먹고 싶고.
약이 충동을 줄여주는 건 좋았어요. 화를 가라앉혀주는 기능을 해서 좋은 점도 있었지만, 약을 먹고 나서 손 떨림이 되게 심했어요. 그래서 간호학과 실기시험에서 0점을 받은 적도 있었어요. ‘만점을 안 받으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그때는 학교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되게 불안했어요. 공황인지 과호흡도 오고, 어지럽고 숨이 안 쉬어지고. 그야말로 죽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날을 기점으로 약을 끊었어요. 의사와 상의를 한 후에 비상약만 처방받고서 지금까지 이렇게 지내고 있어요.
휘: ‘만점을 못 받으면 어떡하지?’ 걱정했다고 하셨는데 실기시험에서 0점을 받고 나서는 어떻게 되었나요?
은: 그냥 성적만 낮게 나오고 아무 일도 없었죠. (웃음) 제가 완벽주의 성향이 있어서 플래너에 쓴 일을 안 하면 잠도 안 자고 모든 걸 다 완벽하게 끝내려는 습관이 있어요. 완벽주의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이 됐는데요. 성적이 낮은 대학에 왔으니까 ‘내가 여기에서는 1등을 해야 해.’ ‘서울대병원에 취직해야 해.’ ‘거기서 간호사가 돼서 유명한 교수가 돼야 해.’ 이러한 생각을 많이 가졌어요. 그래서 1학년 1학기 때는 정말로 1등을 했거든요. 그런데 그때 이후로 불안감이 더 막강해졌어요.
휘: 되게 역설적이네요. 오히려 1등을 하고 나니까 그 후부터 불안해진 거죠.
은: 네. 압박감이 너무 심했어요. 1학기 때는 1등을 했는데 ‘갑자기 성적이 떨어져서 교수님들이 뭐라고 하면 어떡하지?’ ‘누군가 나한테 실망하면 어떡하지?’ ‘장학재단 커트라인에 못 미치면 어떡하지?’ 이렇게 생각했어요. 저의 성적이 생계와도 직결되다 보니까 압박감이 더 심했던 것 같아요.
휘: 그러면 1등을 했을 때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어요?
은: 다음에도 1등 하라고 했어요. 다음 학기에 성적이 더 낮아지면 왜 이번에 못 나왔냐 하기도 했고. 학점을 4.3 만점에 4.2는 무조건 받아야 한다는 기준을 걸어 놓더라고요. 제가 장녀라서 그렇지 않았을까요. 취업이 잘 되는 전공이기도 하고요. 빨리 가정과 생활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셨죠.
휘: 오, 너무 싫어요. 죄송해요. 너무 스트레스받네요. (웃음) 그 기대에 응하기 싫다는 생각은 안 하셨어요?
은: 했죠. 하지만 그 기대치에 부응해야지만 다들 좋게 반응하잖아요. 열심히 하는 게 제가 가는 길에 도움이 되기도 하니까 그냥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휘: 너무 힘들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은 님을 지켜주는 마인드는 무엇이었나요?
은: ‘나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본보기가 되어서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 마인드로 버티고 있어요. 사람들이 저처럼 안 힘들어했으면 좋겠어요. 한창 힘들 때 교수님한테 도움을 청한 적이 있어요. 그때 저한테 “네가 매일 우울하지는 않았을 거다.”라고 하셨어요. 그 말을 듣고 주변을 둘러봤죠. 아주 잠깐이지만 친구들이랑 대화할 때 제가 행복했더라고요. 그런 순간을 조금씩 조금씩 모으다 보니까 어둠 속에도 빛은 있다는 걸 느꼈어요.
그분이 정신간호학 교수님이었는데요. 제가 안 좋은 생각을 할 때마다 “너 평생 그렇게 살 거야? 나는 네가 좋은 쪽으로 생각을 하면 좋겠다.” 이런 말을 많이 해주셨어요.
“교수님, 저 왜 살아야 돼요?” 제가 그러면 “나도 그럴 때 너무 혼란스러웠어. 그런데 조금 버티다 보니까 괜찮아지더라. 지금은 조금 혼란스러울 수 있어.”라면서 위로를 해주셨어요. 그때를 잘 버티고 넘겼기 때문에 저도 교수님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누군가 안 좋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고비를 조금 넘겨줄 수 있는 사람. 용기가 되고, 버팀목이 되는 그런 사람이요.
휘: 교수님이 정말 좋은 동력이었네요. 그렇다면 마음이 힘든 사람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으신가요?
은: 음, 우울이 심하면 그 상태로 평생 갈 것 같거든요. 지금처럼 계속 힘들기만 할 거라는 생각이 들 거예요.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얘기하고 싶어요. 돌아보면 행복했던 일이 한 번쯤은 있었을 거예요. 그런 작은 기억을 하나둘씩 뭉치면 점점 더 크게 느껴질 테니까 같이 한 번 이겨내 보자는 말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사람들은 평탄한 삶을 살아온 사람보다, 어려움을 극복한 사람의 모습에 더 감동하니까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될 수 있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휘: 멋진 말이네요. 혹시 준비하셨나요?
은: 아뇨. (웃음) 선생님들이 했던 말들이 계속 떠올랐어요.
휘: 여러 상담사 선생님과 교수님의 말들이 은 님에게 머물러 있다가 이렇게 입 밖으로 흘러나온 거군요. 그러면 반대로 은 님이 사람들한테서 듣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은: 음. “높이 안 올라가도 된다.” “그냥 사는 것도 괜찮다.” 이 말이 듣고 싶어요. 왜냐하면 제 기준이 높잖아요. 교수도 하고 싶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교육 콘텐츠도 만들고 싶고. 그래서 그냥 평범하게 회사에 다니고, 친구들이랑 술도 마시고, 막 놀아도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어요. 꼭 기준치를 올려서 높이 안 올라가도 된다는. 그런 말. 그 말을 듣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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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은’이 요리사 같다고 생각했다. 그중에서도 싱싱한 채소로만 음식을 만드는 사람 말이다. 정신병자냐고 비난하는 가족, 장녀에게만 거는 높은 기준, 쉽게 인정해주지 않는 엄격한 말투와 표정, 신뢰가 가지 않는 상담사, 당신보다 힘든 사람이 많다는 말, 내가 나에게 요구하는 완벽함. 자기를 자꾸 쿡쿡 찔러 끝내 울려 버리는 그런 말들이 상하고 썩은 채소라면, 그는 그런 부분을 깨끗한 물로 씻거나 칼로 싹둑 잘라 버렸다.
네가 늘 우울하지만은 않았을 거란 교수의 말,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님에도 열두 살의 고민을 진지하게 듣고서 “편지를 써 보세요.”라고 답한 어느 상담사, 오늘은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자꾸만 전화를 해 물어보는 얼굴 모를 누군가. 그는 자기를 살린 말들을 한데 모아 ‘나도 언젠가 이 말을 남들에게도 해줘야겠어.’ 다짐한다. 그것이 꼭 자기가 엄선한 채소를 깨끗하게 다듬어 싱그러운 요리로 대접해주는 마음과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먹고 감동한 음식의 레시피를 굳이 굳이 찾아본 다음 남들에게 똑같이 만들어주곤 하니까.
자기가 듣고 좋았던 말들을 다듬고 끓이고 데치고 간을 보고 센 불에 볶아 만든 은의 요리는 상상만으로 군침이 돌았다. 그 메뉴는 특히 건강에 좋을 것이다. 나는 자기가 맛있게 먹은 음식을 남에게도 해주려는 은이 5성급 호텔의 셰프만큼이나 멋져 보여서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그 결심을 하게 해준 은에게 곧장 했다.
사랑하는 언니들이 나에게 보내준 걱정 어린 눈빛, 나는 네 편이야 라고 말할 때의 목소리 높낮이와 세기, 내 이야기를 듣고 같이 화를 내준 친구들의 표정, 좋은 일이 생겼을 때 활짝 웃으며 잘했다고 칭찬해준 애인의 눈웃음, 넌 그럴 때 어떤 말이 듣고 싶었어? 물어보곤 내가 듣고 싶었다고 한 말을 다같이 함성으로 질러준 동기들의 입 모양. 그것들을 모두 머릿속에 불러와 소금 한 꼬집으로 간을 한 다음 은에게 대접해주었다. 더 높이 안 올라가도 돼요, 그냥 사는 것도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그리고 그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