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했다. 원래 나이가 들면 아들과 개와 남편이 죽은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 긴 대화를, 그리고 나를 잊어버릴 수 있지? 내가 얼마나 열심히 듣고 기억하려고 적어 놓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런 생각과 함께 눈알을 굴렸다. 자명과 같은 병실을 쓰는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고 푸하하 저 사람 벙찐 것 좀 봐, 하며 웃었다.
나는 간호사 선생님을 찾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김자명님이 저한테 엄청 사적인 얘기를 해주셨는데요. 엄청 심각한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저를 완전히 기억을 못 하시네요. 혹시 치매이신가요?”
“아유, 여기 그런 사람들 천지예요. 온 지 얼마 안 돼서 놀랐겠네. 갑자기 사람 불러 세우고 엄청 빠르게 와다다 말했죠? 그거 조증 증상이에요. 언어 압박이라고. 이따 검색 한 번 해봐요.”
자명은 양극성 정동 장애를 진단받았다. 조증과 우울이 번갈아 나타나 조울증이라고도 불린다. 조증은 행복감에 심취해 말이 많아지고 사고도 빨라 주제가 휙휙 바뀌고 아이디어가 풍부해지는 증상이다. 하루에 2시간도 채 못 잤음에도 피곤하지 않다고 느끼고, 에너지가 넘쳐서 사업에 투자하거나 물건을 여러 개 사들여 빚이 생기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거나 환각이나 망상과 같은 정신병적 증상을 경험하기도 한다.
조증이 일주일 이상 지속되고 정신병적 증상이 있으면 1형, 정신병적 증상이 없으면 2형(경조증)으로 분류된다. 잠에 늦게 들어 수면 리듬이 망가졌을 때, 사랑에 빠졌을 때, 아이디어가 확장되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껴질 때, 밤을 새우고 나서 기분이 확 좋아졌을 때,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조증이 유발된다.
언어 압박은 자기 마음에 있는 모든 걸 공유하고 싶다는 압박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게 누구든 붙잡고 얘기를 쏟아낸다. 상대가 대답할 틈이 없을 정도로 말이 빠르고 긴박한 게 특징이다. 언어 압박은 양극성 장애에서만 나타나지는 않는다. 조현병, 불안장애, 조증의 수많은 증상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우울증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자명이 마음에 있는 말을 모두 쏟아낸 다음 나를 기억하지 못한 이유는 조증을 지나 보내는 중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병이 만성화되어 인지 능력이 퇴화했거나 나이가 많아 그럴 수도 있다. 나는 살면서 정신과 이슈라고 해봐야 우울, 불안, 트라우마만 경험했었다. 나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은 우울 때문에 죽고 싶다고나 했지, 조증 때문에 힘들다고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나는 우울의 얼굴만 아는 사람이었다.
사람은 자기 경험으로 다른 사람을 읽어낸다. 자명을 처음 만난 날의 나도 그러했다. 울분을 토하는 자명을 보면서 ‘한이 많이 맺혔구나’ ‘아이를 먼저 보낸 트라우마가 있구나’ 생각했다. 내지는 ‘이 사람도 말이 많은 스타일이구나. 앉혀 놓고 30분 동안 자기 자랑만 한 사람과 비슷할 수도 있지’ 그냥 그렇게 여겼다. 하지만 언어 압박이라는 언어를 알고 나서는 질병과 성격은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 후로도 자명은 종종 내 손을 잡고 비밀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했다. 밤에 잠이 오지 않아 병동 복도를 왔다 갔다 하다 보니 금방 아침이 되었다는 말로 시작했다. 누군가와 이야기하지 않을 때에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괜히 싸움을 걸기도 했고, 작은 손을 주먹으로 쥐어 천장을 찌르는 춤을 추기도 했다. 누군가의 재미없는 농담을 듣고서 숨이 넘어가라 웃기도 했다. 그리고 2주 정도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침대와 한 몸이 돼 16시간 내리 잠만 잤다. 내가 인사를 하면 이불로 얼굴을 덮어버리는 자명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면 다시 조증이 시작되어서 지나가는 나를 붙잡고 머릿속에 있는 말을 쏟아내기를 반복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유, 그러셨구나. 그런데 제가 좀 바빠서요. 다음에 또 만나요!”
당신이 차분해졌을 때, 그리고 나도 차분하게 들을 준비가 되었을 때, 그때 우리가 대화하는 게 좋겠어요. 생각하면서 다음을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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